구하기 어려운 책이었는데 어떻게 지난주에 어떤 예전에 우리교회에 다니던 분중 이사를 간다고 책들을 다 도네이션을 하셨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였다. 안그래도 돌아가시고 그 책이 너무 유명하여져서 사려고 했으나 유언으로 더 이상 찍지 말라고 했다니 (아마도 그 이후에 법정 절차 거쳐서 다시 찍은 것으로 안다) 대단한 분이다. 그래서 더욱 더 귀한 책이 되었는데 우리 교회 도서실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어떤이들은 교회에서 스님이 쓴 책을 갖다 놓는다는것에 대해 반대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스님이, 혹은 불교신자들이 성경을 읽으면 못 읽게 할 것인가? 또한 기독교인들이나 목사님들이 쓴 책을 그들에게 못 읽게 한다면 얼마나 우스울까?
나도 어렸을적 한때는 엄마따라 절을 열심이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고 그래서 절과 그 주변의 자연과 음식들은 아직도 마니 그립다! 미국에 와서 교회를 나가게 되었지 아마도 내가 한국 계속 살았다면 기독교인이 안되을 지도 모르겠다. 워낙 집안이 불교 행사에 많이 involve 되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리라, 나는 택함 받은 자녀!라고 생각해본다.
어쨋든, 이책은 그냥 산문식으로 써내려간 법정 스님의 일상 생활들을 포함한 글들이 잔잔하게 내가슴에 다가왔다. 그런데 한참 예전에 쓰신글들이 많이 들어있다. 1970년대초에 쓴글들이...
편하게 읽혀졌다.
책에서 마음에 와 닿는 몇구절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본다.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 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 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 두고 싶다." 1973년
우리 기도교인들은 천국에서 만나면 그렇게 하겠지?
소제 '무소유' 중
저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을 읽고 자신이 가진것이 너무 많아 몹시 부끄러웠단다.
스님이 가지면 얼마나 가졌기에... 그의 글을 보면
"사실 이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중략...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화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 그것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출타를 하게 된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자 난초를 뜰에 내놓은채 온 생각이 나며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올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나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중략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1971"
이글을 읽으며 나도 참 부끄러움을 많이 느낀다.
얼마나 더 없는것에 나도 집착을 할 때가 있는가. 뭐 세상을 살아가면서 있을 기본적인 것은 어차피 갖추고 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요즘 주위에서는 개, 강쥐들(강아지를 줄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doggism ?스펠이 맞나 모르겠다.
십수년전에 우리교회에 오셨던 일본에서 선교하시는 목사님 한분이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생생하다.
사람들이 이젠 생활이 풍요로와 지고 외로와 지니까 개들을 기르는데 과연 그 얘기들을 들어보면 과간이 아니다. 많은 경우 그런집의 개들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대접받고? 산다.
나도 주위에서 너무 많이 요즘 접하는 일들이다.
교회에서도 팟럭이나 이런 모임에 자매들 주된 얘기들이 완전히 개판(?) 이다. 개의 병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짓들에 대해서, 얼마나 똑똑한가 서로 자랑들... 개 얘기가 나오면 흥분들 하고 끝이 없다.
개 안기르는 집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과연 doggizm 이 판치는 세상이 된것 같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개들에게 attach 되고 그걸로 인하여 불편도 감수해야 되지만 어차피 거기에 묶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 너무 많이 본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우상 숭배 운운한다. 우상이 결국 무엇인가?
어떨땐 교회도, 혹은 가족 휴가도 개 맡길 때가 없어 방해를 받으면서도 말이다.
항상 무엇에나 너무 치우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자녀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돈 버는 것도 말이다.
본인들은 자녀들이나 그아이들의 행사 내지는 과외 활동때문에 더 많이 얽매이고 (물론 너무 극성으로 하는 부모들만 해당되겠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중요한게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텐데 적당히, 알맞게 하기는 무엇이든 항상 힘든가보다.) worker holic 들은 일에 얽메이고 살면서 우리는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처럼 말하고 자신들을 돌아보는 것은 너무 소홀히 하는 것 같다. 나를 위시하여 말이다. ^^
소제 '오해' 중에서
"세상에서 대인관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 봐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1972년
설해목 중에서
"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굴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1968년"
이글은 1973년으로 되어있는데 재밌어서 여기 옮긴다.
" 한때 우리 나라에는 '섰다' 하면 교회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도 이제는 빛이 바래졌다. 그 자리에는 바야흐로 호텔과 아파트가 우뚝우뚝 치솟고 있다....
서민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 장려되고 있는 건축양식이 아파트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아파트가 본래의 건축 목적을 외면한 채 호화판으로 기울고 있으니 어떻게 된 노릇인가. 심지어 한 가구에 2천만 원짜리까지 있다니..."
너무 웃기다. 세월의 흐름을 볼수 있는게 화폐 가치이겠지. 예전엔 2천만워짜리가 비쌋지만 지금 왠만한 호화 아파트는 15억 20억을 훨씬 웃돈다는데 아마도 100억 짜리도? 우리같은 사람은 못 살아도 말이다. ㅋㅋ
소재 "인형과 인간"에서
" 내 생각의 실마리는 흔히 버스안에서 이루어진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시내 버스 안에서 나는 삶의 밀도 같은 것을 실감한다. 설실이나 나무 그늘에서 하는 사색은 한적하긴 하지만 어떤 고정관념에 갇혀 공허하거나 무기력해지기 쉬운데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동감을 느낄수 있다." ... 중략.
이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나도 주로 운전하고 다닐때나 운동하고 있을 때 혹은 책을 읽으면 거기서 주는, 아니면 연관되는 생각들이 줄줄이 나는데 막상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글을 쓰자고 마음먹거나 하는 날들에는 정작 예전에 스쳐가던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이미 떠나버린 후다. 그래서 잊기전에 바로 바로 어디 적어 놓거나 그 당시에 바로 메모를 해야하지만 현실적으로 시간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하다못해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올리거나 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앞으로는 되는대로 바로 해보자고 생각해 본다.
p89. "현대인들은 이전 사람들에 비해서 아는 것이 참 많다.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니라도 신문, 잡지와 방송 등의 대량 매체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똑똑하고 영리하기만 하다. 이해와 타산에 민감하고 겉과 속이 같지 않다. 매사에 약삭빠를 뿐 아니라 성급하고 참을성이 모자라는 현대인들에게서 끈기나 저력 혹은 신의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할 수 없다. 물결에 씻긴 조약돌처럼 닳아질 대로 닳아져 매끈거린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일이다. 더군다가 그 시절에 한국에서는 더더욱이 바쁘게들 살았을테니까. 나도 성격이 많이 급한편이다. 미국에 산지가 30년이 넘어가다 보니 그래도 주변 환경탓을 받은 탓인지 조금은 나아졌겠지만 아마도 계속 한국 살았으면 별다를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런걸 보면 주위, 환경탓이 참 중요하다. 느긋해 지는법을 배우는것, 아니 일부러 안그래도 주위에서 전체적 흐름이 그런 것을 몸으로 느끼다 보면 나도 모를게 거기에 물드나 보다.
p91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는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는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일은 무엇일까...
무학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학문에 대한 무용론도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는 것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한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발랄한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지식에서 추출된 진리에 대한 신념이 일상화되지 않고서는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은 인간뿐이다...
소재 "침묵의 의미" 중 100
좋은 친구란 무엇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보는데, 첫째 같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아닐 것이고, 벌써 이렇게 됐어? 할 정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는 정다운 사이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 되면 그건 허울...
가끔 빡빡한 현실 생활에서 이런 여유있는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같다.